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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에세이_새벽 바다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
낚시에세이

 

에세이

 

새벽 바다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

 

일러스트_탁영호

 

폭풍이 지나간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언제 그토록 흉포했냐는 듯 눈이 부시도록 고요하다. 잔잔하게 부서지는 금빛 윤슬 위로 숭어나 날치 따위가 뛰어 오르고, 푸른 수평선이 긴 줄을 뻗어 멀리 있는 석양을 잡아당기면 풍랑에 움츠렸던 사람의 마을에도 평화로운 저녁이 온다. 나는 그 저녁 바다의 아늑함을 좋아한다. 밤새 머리맡으로 밀려오는 부드러운 꿈결을 사랑한다.
나는 시련을 이겨낸 사람에게서도 푸른 바다를 보곤 한다. 세월과 세상을 오래 견뎌온 사람의 삶에서는 새벽 바다의 향기가 난다. 나는 그런 사람과 마주앉아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그와 밤늦도록 술잔을 부딪치는 일을 사랑한다. 그는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중용(中庸)이라든가 정중동(靜中動)의 지혜는 어느 날 그냥 깨우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역경을 견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근육, 그 뿌리 깊은 힘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장석주,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 우리가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은 우리 삶이 늘 예기치 못한 풍랑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너울 하나를 넘으면 더 큰 너울이 온다. 성난 파도 앞에 인간은 작은 뗏목처럼 초라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버티다 보면 마침내 바람이 잦고 물도 잠든다. 거센 풍랑을 지나보내고 맞이한 아침, 거짓말처럼 투명한 햇살에 벅차올라 눈물을 흘려본 적 있는 사람만이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다.
지난 1월, 새해를 맞아 제주도로 떠났다. 오랫동안 고대하던 낚시 여행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심상찮았다. 다음날 서귀포 사계항에서 타기로 한 배는 기상악화로 출항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작곡가 임상혁 형이 제주에 타이라바를 즐기러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음악계에서 ‘히트곡 메이커’로 잘 알려진 임상혁 형은 전 기간이즘 필드스탭이자 현재 잔카 스탭으로 활동 중인 실력파 앵글러이기도 하다. 임상혁 형과는 한국낚시방송(FISHING TV) 송년회에서 알게 되어 친분을 쌓았다. 음악과 문학, 둘 다 예술을 하기에 서로 통하는 데가 많다. 형에게 연락해보니 다행히 김녕 쪽은 기상이 괜찮아서 내일 배가 뜰 수 있다고, 자리 하나를 마련해주겠다고 한다. 낚시를 못하게 된 상황이었는데, 형의 배려 덕분에 출조할 수 있게 됐다. 다이내믹하기로 소문난 김녕 필드에서 펼칠 참돔과의 한판 승부 생각에 설레어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월정항에서 임상혁 형과 만나 ‘맑은청년 낚시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배에 올랐다. 채비를 마치고 보니 배에 낯익은 분이 계셨다. ‘옹알스’로 유명한 개그맨 조수원 형이었다. ‘옹알스’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넌버벌 퍼포먼스 쇼다. 조수원 형과 임상혁 형은 오래 전 배스낚시를 하며 가까워져 오랜 시간 민물과 바다를 넘나들면서 루어낚시를 즐겨왔다. 나는 조수원 형을 어느 행사 자리에서 딱 한번 뵈었을 뿐이어서 다소 쭈뼛거리며 인사를 드렸는데, 형이 몹시 반갑게 맞아주시는 덕분에 마음이 환해졌다. 우리는 셋이 나란히 서서 낚시를 시작했다.
바람이 세게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리는 날씨, 너울이 이는 바다는 꽤 꼴랑거리긴 해도 낚시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다만 바람과 조류의 영향으로 라인이 많이 흐르는 상황, 임상혁 형의 조언대로 빠른 릴링을 통해 슬랙라인을 최소화하면서 120미터권 바닥을 탐색했더니 머지않아 입질을 받을 수 있었다. 지렁이를 쓰지 않으니 입질이 깨끗했다. 라인을 쭉 가져가는 시원한 입질, 5분여의 파이팅 끝에 물 위로 올린 녀석은 60센티미터급 준수한 씨알의 참돔이었다. 이날 바다 활성도가 괜찮았는지 이후로도 여러 마리의 씨알급 참돔을 걸어낼 수 있었다. 쏨뱅이, 열기와 함께 제철을 맞은 방어가 손님고기로 올라왔다.
임상혁 형은 본인 낚시하기도 바쁠 텐데 옆에 선 나를 향해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며 친절한 조언은 물론 계속 말을 걸어주고, 간식거리를 챙겨주는 등 내내 신경을 써주었다. 그런데 사실 그날 배에서 가장 배려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임상혁 형이었다. 지난 10월, 사고로 왼팔이 골절되는 큰 부상을 당해 수술을 한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필드에 나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깁스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고, 통증까지 있는 상태임에도 낚시를 향한 열정과 의지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왼팔에 보조기를 착용한 채 다소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릴링을 하면서도 형은 대물 참돔과 대방어를 끌어 올렸다. 포인트 이동을 위해 채비를 회수해야 할 때면 나를 비롯한 주변의 동료들이 대신 릴을 돌려주었다. 그때마다 형은 몹시 미안해했다.
조수원 형은 이동 중 큰 파도가 칠 때마다 본인은 등으로 물을 다 맞으면서 물이 튀지 않는 곳으로 나를 끌어당겨주었다. 형이 큰 방어를 랜딩하는 과정에서 나와 라인이 엉키는 바람에, 라인을 풀다가 그만 내 채비가 바닥에 걸려 헤드와 바늘을 끊어냈다. 낚시를 하다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 데다가 원줄이 끊어진 것도 아닌데 형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이 잡은 대방어를 가져가라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데도 자기는 생선 필요 없다면서, 이걸로 ‘방어 합의’를 하자는 조크까지 곁들여 내게 귀한 고기를 선물했다. 얼마 전 티브이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된 조수원 형은 방송을 통해 알려진 대로 2016년 6월 혈액암 진단을 받고 4년 가까이 병마와 싸워왔다. 힘겨운 항암 치료를 마침내 다 이겨내고 완치 단계에 이르러 이제 재발 방지를 위해 예방약을 복용하며 예후를 지켜보는 중이다. 형은 투병 중에도 무대를 향한 열정과 관객들에 대한 사랑을 한 순간도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두 형과 함께 낚시를 하는 동안 자꾸 뭉클함을 느꼈다. 두 형 모두 폭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한없이 아름답고 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임상혁 형과 조수원 형은 저마다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낚시는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는 과정인 동시에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도약의 여정이다. 나는 두 멋진 형들에게 낚시는 물론 인격과 성품까지 함께 배웠다.
너울이 이는 김녕 바다에서 월정항으로 돌아오니 항구는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어깨를 걸친 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날 저녁은 조수원 형이 선물한 방어 덕분에 행복했다. 마침 지난학기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 몇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부위별로 썰어낸 제철 대방어회를 실컷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학생들에게 임상혁 형과 조수원 형 자랑을 한참 했다. 우리도 ‘이겨낸 사람들’이 되자고, 굳게 약속하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밤새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펜션 안은 아늑했고, 꿈에선 고요한 밀물이 부드러운 손으로 머리를 감겨주었다. 머리맡에서 새벽 바다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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