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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에세이_ 어떤 탈선의 추억
낚시에세이

에세이

 

어떤 탈선의 추억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대부분 낚시인들이 그렇듯 나도 아버지께 낚시를 배웠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매주 주말마다 아버지와 함께 강과 저수지, 댐으로 낚시를 다녔다. 아버지와의 낚시는 내 유년의 가장 큰 행복이었으나, 그것은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부서졌다. 가방공장이 부도를 맞고,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 해에 한 번 뵙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내 사춘기에는 아버지가 부재했고, 아버지와의 낚시 역시 흘러간 추억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일찍 알아버린 가난은 필연적인 방황으로 이어졌다. 중학교 마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일찌감치 공부에는 관심을 끊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공고로 전학을 갔다. 이수역 태평백화점 뒷골목 ‘김가네’에서 시급 이천오백원 받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대학 입시와 무관한 공고생이라며 아무도 나를 학생이라 부르지 않았다. 인문계 학생들이 문제집 펴고 공부할 때 우리는 지하 실습실에서 납땜을 했다. 방과 후에는 술집으로 흘러들어 서빙을 하고,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배달을 다녔다. 수업시간에는 당연히 엎드려 잠만 잤다. 그런 생활이 즐겁고 행복했다. 아니 그런 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왜 없었을까? 그걸 잊으려고, 어떻게든 잊으려고, 방황은 그저 안쓰러운 환각제였을 뿐, 그 끝에는 항상 공허함과 세상을 향한 분노 같은 것이 찌꺼기처럼 남곤 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해 초여름 날 문득 낚시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멀리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낚시가 너무 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면목동으로 가 보라고 했다. 당신이 쓰시던 낚시용품들이 그곳의 한 지하 창고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당동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어느 피혁공장 지하실, 아버지가 직접 가죽원단을 자르고 미싱질을 해 만든 낚시 가방이 퀴퀴한 어둠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 학교를 땡땡이치고 낚시터로 향했다. 책가방 대신 낚시가방을 메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피해 터벅터벅 걸었다. 사당역에서 777번을 탔다. “학생이요”라고 안 하고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요금통에 넣었다. 수원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는 화성 봉담읍 해병대사령부까지 왔다. 도로변에는 애기똥풀이 가득 피어 있고, 화물차 매연 아지랑이 너머로 휴가 나가는 군인들이 신나 보였다.
‘화성’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지만 내게는 ‘탈선의 추억’이 깃든 도시다. 덕우저수지는 아버지와 이따금 찾던 낚시터, 먼저 매점부터 들렀다. 혼자 왔느냐는 관리인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은 딸기맛 글루텐과 찐버거, 에코스페샬에 이곳 붕어들 반응이 빠르다며 추천했지만 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낚시 가서 손으로 주무르며 놀던 신장떡밥 냄새가 몹시 그리웠다. 신장떡밥 한 봉지와 3밀리 케미컬라이트를 사서는 낚시 자리로 왔다. 돌아갈 차비 말고는 한 푼도 없었으므로 빵 한 개조차 살 수 없었다. 관리실 앞, 삐거덕거리는 나무 잔교좌대에 간이의자를 펴고 받침대를 꽂았다. 떡밥을 개고 새우채집망을 내렸다. 배가 고팠지만 참았다.
한 칸 반, 두 칸 반, 세 칸 반 대를 부채꼴로 펼쳐 놓고 내 키만큼 찌를 맞춰 채비를 던졌다. 아버지께 배운 낚시 방법들을 몸이 용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한 주 전 내린 장맛비 때문인지 수심이 깊어 찌가 자꾸만 가라앉았다. 찌고무를 30센티미터쯤 올리자 그제야 어느 정도 영점 맞춤이 됐다. 저 물에 빠지면 나도 머리끝까지 잠기겠지, 그러면 나도 세상도 다 사라질 텐데…… 낭만적 우울은 그 나이 때 감기 같은 것이었다.
붉은 노을을 되비추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저 속에는 온가족이 함께 모여 앉아 밥 먹던 저녁의 웃음소리가, 온갖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는 않을까? 교복 대신 조숙한 쓸쓸함을 입고 찌톱을 바라보는 동안 산새 소리, 황소개구리 우는 소리, 트럭들이 지나가는 소리, 저쪽 저수지 건너에서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는 소리가 귓가에 글썽거리며 어느새 저녁이 왔다.
낱마리나 좀 올렸을까. 살림망을 내린 걸 본 관리인이 입어료를 걷으러 왔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수면 위로 어둠이 내려앉자 케미컬라이트 불빛들이 어릴 적 내 방 천장에 붙여놓았던 야광별 스티커처럼 반짝였다. 모기가 성가시게 굴어도, 이른 열대야가 목덜미에 땀을 흐르게 해도 그저 물과 하늘 사이의 허공만 바라보았다. 때때로 멍해질 때마다 찌가 올라오는 바람에, 붕어 몇 마리 놓치고는 씩씩, 욕지거리나 내뱉으면서 밤낚시는 깊어졌다.
옆자리에서 어른들 몇이 술판을 벌였다. 한 아저씨가 “이리 와서 소주 한 잔 해요”하며 손짓했다. 하루 종일 굶어 배가 고팠다. 가스버너에 올린 코펠 속에서 라면이 끓고 있고, 신문지 위에는 편육과 치킨이 펼쳐져 있었다. 맛있는 냄새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스무 살이에요” 거짓말을 하고는 어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앉아 종이컵에 소주를 받아 마셨다. 허겁지겁 라면을 집어 먹었다.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불콰하게 취해 자리로 돌아와 떡밥을 새로 갈아 던졌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캄캄한 물을 바라보니 입질은 없는데 케미컬라이트 불빛들이 춤을 췄다. 꼭 빠가사리나 메기가 찌를 끌고 난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만이천원짜리 결석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할까?’ 지쳐버린 내 그림자가 나를 붙잡고는 어디로도 못 가게 하는 밤이었다. 술을 마신 탓인지 가슴 속에 불덩이가 얹힌 것만 같았다.
그날의 밤낚시는 내게 사춘기 시절의 뜨거운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스운 것은, 밤 깊은 저수지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소주에 취해서는 한숨 푹푹 쉬며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른 일이다. 나는 여태까지 아버지가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는 것을 딱 한 번 봤는데, 내가 어릴 때 할머니 환갑잔치에서 아버지가 부른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재’다.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치고 싶었던 질풍노도의 밤, 그러지 못하고 나지막이 노래를 중얼거린 것은 “밤낚시 할 때는 절대 조용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더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나는 지금도 붕어낚시를 할 때면 ‘울고 넘는 박달재’를 흥얼거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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