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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연재 에세이_ 냄새도 저녁 피딩을 한다
낚시에세이

연재 에세이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냄새도 저녁 피딩을 한다

4월 중순에 늦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5월 초 때 아닌 여름 더위가 찾아왔다. 이제 우리나라엔 계절마저도 중간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햇살 환한 공중에 하얀 눈송이 같은 버드나무 꽃가루가 날아다니고, 벌과 나비들이 붕붕거리는 풍경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기온이 오를수록 수온도 오른다. 붕어 산란철도 끝나고 제주 참돔 타이라바 시즌도 마무리되고 쏘가리는 금어기지만 이제 서해권에서 낚시하기 좋은 오뉴월이다. 한낮의 땡볕에 데워진 갯바위에서 피어오르는 따끈따끈한 물비린내가 그립다.
집 앞 안양천을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마스크를 벗어본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묘한 냄새들이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햇살에서는 연필심 냄새가 나고, 바람이 실어 나르는 관악산 녹음에서는 어릴 적 좋아하던 메론맛 아이스크림 냄새가 난다. 흔히 “계절을 탄다”는 것은 환절기 대기 중에 스며있는 냄새에 대한 반응이다. 이 ‘계절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일수록 감수성이 풍부하다. 서정주는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내 경우에는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팔할이 냄새”다. 특히 강과 호수, 바다에서 맡은 낚시터의 냄새는 서울에서 태어나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내게 고향의 향기가 되었다. 물과 갈대와 수몰나무와 이름 모를 꽃들이 몸을 섞어 만들어내던 그 냄새들은 내 후각적 자연 체험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다.
인간에게는 오감이 있다. 그중 후각은 가장 직접적인 감각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 냄새의 분자는 비강 속으로 흘러 들어가 점막에 흡수되는데, 비강 점막에는 섬모라는 미세한 털을 가진 수용기세포가 무려 500만개나 있다. 이 수용기세포들이 뇌의 후각 중추에 신호를 보낸다. 이 세포는 오직 코에만 존재한다. 눈이나 귀의 신경세포는 한번 다치면 다시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지만, 코의 신경세포는 인체의 다른 신경세포와 달리 약 30일을 주기로 재생된다고 한다.
<감각의 박물학>을 쓴 다이앤 애커먼은 “냄새보다 기억하기 쉬운 것은 없다. 어떤 향기가 순간적으로 스쳐간다. 그것은 포코노스의 호숫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야생 월귤 덤불에는 물기 많은 과일이 가득 달려 있고, 이성(異性)이 우주여행만큼이나 신비롭게 보이던 때였다. 그것은 또한 달밤의 플로리다 해변에서 보냈던 정열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밤에 피는 선인장은 대기를 진한 향기로 물들이고, 거대한 나방들이 요란스럽게 날갯짓을 하며 선인장을 찾아들었다. 그것은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던 시절, 은매화가 만발한 8월의 중서부에서 쇠고기 찜, 국수 푸딩, 달콤하게 요리한 감자로 저녁 식사를 하던 시간 역시 떠올리게 한다. 냄새는 오랜 세월 동안 덤불 속에 감춰져 있던 지뢰처럼 기억 속에서 슬며시 폭발한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수많은 영상들이 덤불 속에서 튀어 오른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후각은 우리의 감정과 사고, 그리고 생명과 가장 밀접한 감각이다.
섬진강에 쏘가리 루어낚시를 하러 갈 때면 아침 피딩타임 전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 한두 시쯤 집에서 나선다. 서해권 선상낚시를 갈 때도 마찬가지다. 새벽 다섯 시 전후로 출항하기 때문에, 주차 자리 확보와 아침 식사를 위해 여유 있게 일찍 출발하는 편이다. 새벽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맡는 축축한 밤공기 냄새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도로변에 핀 잡풀들이 진한 체취를 뿜어내는 심야의 휴게소, 편의점 온장고에서 꺼낸 따뜻한 캔커피 냄새를 음미하는 순간부터 낚시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낚시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냄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체에 거른 보릿가루처럼 부드러운 보리 떡밥 냄새, 꾸덕꾸덕하게 반죽된 신장떡밥 냄새, 메주 곰팡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깻묵 냄새, 밀크코코아 가루 같은 글루텐 냄새…… 이런 ‘곡물 계열’의 냄새들은 나를 기억의 방앗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또 이런 냄새들도 사랑한다. 새벽 출항을 앞둔 선창가의 디젤 냄새, 새벽 바다를 달려 나갈 때 코끝에 부딪치는 파도 냄새, 40호 봉돌에서 나는 어릴 적 놀이터의 철봉 냄새, 레저보트를 타고 갯바위 홈통과 곶부리를 드나들 때 수중여 물턱에서 피어오르는 멸치 냄새, 그 멸치떼를 쫓아 들어온 농어들의 은빛 비린내, 김장철 생새우젓갈을 떠올리게 하는 밑밥 크릴새우 냄새, 아침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냄새, 저녁에 어디선가 짚불 태우는 냄새, 옥천 지수리 등나무가든 민박에서 밥 짓는 냄새, 옆 좌대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 가스버너에 얹은 코펠에서 신라면이 끓는 냄새, 텐트 안 습기를 머금은 퀴퀴한 나일론천 냄새……
낚시터에 좋은 냄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역한 냄새들이 더 많기도 하다. 낚시터에서 내가 싫어하는 냄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메기 잡으려고 재래시장서 사온 닭간 냄새, 볼락낚시할 때 주로 쓰는 베이비사딘 웜 냄새, 살림통에서 썩어 말라비틀어진 갯지렁이 냄새, 방파제 내항 우럭에서 나는 기름 냄새, 선창가에 상인들이 마구 버려놓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 사대강 공사로 물이 막혀 녹조와 청태 가득한 늪이 되어버린 강물 냄새, 선상낚시에서 바로 옆 조사가 내 얼굴 가까이 뿜어대는 담배 냄새, 바다에서 건져낸 폐그물과 비닐 냄새, 누군가 물 밖으로 함부로 던져 놓은 배스들이 썩는 냄새, 강물로 흘러드는 축산 폐수와 비료 냄새…….
몇 해 전, 금강 옥천 청마리 여울에서 루어낚시를 즐기던 봄날을 잊을 수 없다. 그 시간과 공간을 채우던 온갖 냄새들을 지금도 내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만큼 선명한 기억은 없다. 쏘가리가 대상어였는데 낮 동안 별 재미를 못 봤다. 산란철을 앞두고 혼인색을 띤 바디끄리들이 무섭게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오후 다섯 시가 넘자 늦은 오후의 햇살과 해거름이 뒤섞여 금강이 그야말로 금빛 비단처럼 미끄러졌다. 그때 나는 냄새도 저녁 피딩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낮 동안 잠잠했던 아까시 향기가 노란 송홧가루와 함께 강물에 실려 오는데, 아아 그 달콤하고 아찔한 향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석양에 취해 꽃내음에 취해 그리고 여기저기서 퍽퍽 미노우를 때리는 쏘가리와 끄리와 배스의 손맛에 취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홀했다. 아까시 향기가 강을 삼킬 때 쏘가리도 루어를 삼킨다. 그리고 그 오감의 충만함은 내 영혼을 삼킨다. 그날의 낚시는 내게 마릿수의 쏘가리보다 아까시, 아까시 그 짜릿한 내음을 잔뜩 낚은 쾌감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아, 그 잊을 수 없는 냄새의 피딩타임이여!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지난 4개월 동안 우리는 마스크로 코를 가리고 살아야 했다. 마스크는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해줬지만 자연이 뿜어내는 온갖 향기의 축제에서부터는 격리시켰다. 아직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다. 질병관리본부와 의료진, 봉사자, 그리고 온 국민이 함께 노력해 이제 어느 정도 진정세에 접어들었지만, 방심하긴 이르다.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방역 수칙이 완화되었다 하더라도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하지만 사람이 밀집된 곳이 아니라면,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 자연 속에 홀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면 잠시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 강과 호수와 바다로 가야겠다. 이 계절에만 맡을 수 있는 자연의 싱그러운 내음들은 전부 낚시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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