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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에세이_ 그 섬에 가고 싶다
낚시에세이

에세이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이런저런 글을 쓰고, 학교에 나가 강의하는 게 밥벌이인 내게 여름은 달콤한 휴가철이다. 학교는 방학에 돌입하고, 원고 청탁은 주로 봄과 가을에 몰리는 편이라 여름엔 문장노동의 빈도와 강도가 모두 완화된다. 장마와 폭염, 모기의 습격 같은 악조건도 있지만 레저보트를 타고 아침바다를 달려 섬과 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거나 여울에 몸을 담근 채 허벅지를 쓰다듬는 강물의 손길에 황홀함을 느끼다보면 여름만큼 낚시하기 좋은 계절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존 덴버는 웨스트 버지니아가 ‘almost heaven’이라고 노래했지만 내겐 여름의 부안 위도 태양민박이나 태안 학암포 동백민박이 유사 천국이다. 그늘 하나 없는 갯바위에서 마치 세신사가 때타월로 목덜미를 긁는 듯한 땡볕을 견디며 광어와 쥐노래미 몇 마리 잡아선 민박집으로 간다. 에어컨을 강력 모드로 켜 놓고 찬물로 몸을 씻은 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시면 지상낙원이다. 양푼에 상추, 깻잎, 오이, 당근, 양파,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칼국수가락처럼 길게 회 친 광어를 올린 후 초고추장과 쌈장, 사이다, 얼음을 넣고 버무리면 여름 별미 물회가 완성된다. 얇게 썬 복숭아 몇 조각을 넣으면 식감과 단맛이 더 살아난다. 물회 안주에 소주 맥주 비우다보면 일몰의 바다 위로 별들이 자맥질하는 풍경이 보인다. 밤물결 위로 걸어오는 달빛의 흰 발목이 아름답다.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쏘가리 루어낚시 동호회인 ‘팀쏘가리’에서 쓰는 닉네임이 ‘여름방학’이다. 닉네임에 걸맞게 이번 여름방학에도 낚시 계획을 잔뜩 세워뒀다. 우선 이 글을 다 쓰고 내일 제주도에 한치 이카메탈을 하러 간다. 밤낚시 후 아침 비행기로 올라와선 친구인 매일경제 문학 담당 김유태 기자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용인 사암지 좌대에 타 장마철 오름수위 붕어를 노릴 작정이다. 그 다음날 밤에는 고흥으로 내려가 동틀 무렵 진바다호를 타고 붉바리 타이라바에 도전한다. 한 이틀 쉬고선 홍대 인디뮤지션들과 부안 위도 갯바위에 가 루어낚시를 즐길 예정이다. 그 다음 주엔 보령 오천항에서 밥말리호를 타고 백조기 낚시를 할 거다. 섬진강에 쏘가리낚시도 갈 거고, 레저보트 타고 농어 루어낚시도 할 거고, 인제 하추리계곡에서 견지낚시도 할 거다. 연애나 결혼 같은 건 낚시하느라 바빠서 생각 없다.
썸머 홀리데이 아니 피싱 홀리데이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6월 위도 갯바위에 올라 광어와 농어, 우럭, 쥐노래미 손맛을 꽤 봤다. 7.6피트 미디엄라이트 로드에 2500번 릴, 1.2호 합사, 1/2온스 지그헤드에 4인치 그럽으로 바닥을 긁어 낚아 올리는 광어 손맛이 끈적끈적했다. 민박에서 에어컨 켜고 찬물로 씻고 낚은 고기로 회, 회덮밥, 구이, 매운탕까지 만들어 친구와 술 마시니 행복했다. 며칠 뒤에는 ‘팀쏘가리’ 운영자이자 FTV ‘바다로 간 쏘가리’ 진행자 이찬복 프로가 모는 레저보트를 타고 형제처럼 돈독하게 지내는 김건우 형, 엄일석 군과 함께 격포 바다를 누비며 수중여와 곶부리, 홈통에 있는 농어들을 신나게 끄집어냈다. 셋이서 30kg쯤 잡았는데, 한 며칠 농어회, 초밥, 덮밥, 물회, 스테이크, 생선까스, 전, 매운탕까지 실컷 먹었다. 농어가 냉장고에서 산란을 하는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얼마 전 여수 엔조이호를 타고 한치 이카메탈 나갔다가 폭삭 망한 것은 비밀로 하고 싶다. 내일 제주도에 가 압둘라호를 타는 건 처참한 지난 패배의 복수전이기도 하다.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만, 내일만큼은 꼭 한치를 잘 알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줄곧 낚시를 다니면서도, 낚시 궁리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마음 한 곳이 허전하다. 낚시하러 가면서도 낚시하러 가고 싶다. 저 멀리서 누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원도권 낚시에 대한 열망, 특히 가거도 향수가 점점 도지는 까닭에 헛것이 들리는 모양이다. 아, 가거도! 시인 조태일이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 같지 않은/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이라고 했던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만한 곳이라고… 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가거도」)”이라고 노래한 그 섬에 가고 싶다. 배멀미 심한 친구 놈 귀에다 대고 돌림노래처럼 “여름휴가는 가가거거 가가거거 가거 가거도” 타령을 한 그 가거도, 농어 30kg 잡고 기뻐하는 우리를 보며 이찬복 프로가 “원도권 가면 300kg도 잡을 수 있다”며 예로 든 그 가거도에 가고 싶다.
가거도는 나의 첫 원도권 낚시 체험지다. 벌써 몇 해 전이다. 내게 문학과 낚시, 쾌락주의, 그밖에 온갖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을 가르쳐주신 문학평론가 전영태 선생님과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가거도행 표를 끊었다. 박현우 선장이 모는 엔젤호를 타고 타이라바, 흘림낚시, 바닥 루어를 즐기고, 갯바위에 내려 농어, 볼락, 뺀찌를 잔뜩 낚았다. 타이라바를 문 미터급 부시리를 참돔 UL대로 끌어 올리느라 10여 분간 진땀을 뺀 승부는 언제 떠올려도 짜릿한 추억이다. 은사와 함께 비 내리는 갯바위에서 비박하며 왕사미 볼락들을 뽑아낸 밤샘 낚시는 ‘비 오는 밤의 수채화’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일정 이틀째 밤에 거나하게 술을 드신 은사께서 “내 낚시 장비는 웅기 안 주고 다 너한테 줄 거야”라고 말씀하셨는데, 까먹지 않으려고 공책에 적어뒀다. 전영태 선생님의 둘째 아들 웅기 형은 민물장어낚시 최대 커뮤니티인 ‘원줄이 끊어질 때까지’의 운영자다.
가거도에 가고 싶은 건 낚시가 잘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섬 가운데 우뚝 솟은 독실산과 큰간여, 성건여, 검은여, 오구멍 같은 바다의 기암괴석들이 빚어내는 절경이 그리워서다. 아침에 해무가 끼면 섬 전체가 몽롱한 꿈이 되어 나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신비감에 몸을 떨곤 했다. 어디 경치뿐인가. 엔젤펜션 정미숙 여사님이 밥때마다 한 상 가득 차려내는 ‘가거 미식회’는 식도락의 아스라한 극단이었다. 돌돔회, 볼락구이, 광어조림, 우럭매운탕, 참돔찜, 생홍어회, 해삼내장, 홍합미역국, 전복구이, 뿔소라, 낙지, 돼지묵은지찌개, 닭도리탕 등등 이름만 불러도 위장이 벌렁벌렁해지는 그 맛난 음식들을 삼시세끼 내내 먹은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리워하면서도 선뜻 발길을 내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한 번 크게 데인 트라우마 때문이다. 심한 해무로 여객선이 뜨질 못해 며칠 동안 섬에 감금되고 말았다. 중요한 일이 있어 주말에는 반드시 섬을 나가야 했다. 끌탕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보며 은사께서는 꾸중하셨는데, 그땐 말씀 못 드렸지만 서울에서 예쁜 아가씨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다. 헤엄을 쳐서라도 가야만 했다. 여자 앞에서 그깟 낚시 따위가 대수인가? 진도 서망항까지 가는 사선을 수소문해 빚을 내서라도 배에 탈 각오마저 했다. 그 간절함이 안개를 뒷걸음치게 했을까? 마침 경조사에 참석하는 주민들을 태우고 육지로 가는 배가 있었다. 내가 난리친 통에 전영태 선생님도 그 배에 함께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 그야말로 스승과 제자의 ‘엑소더스’였다.
박현우 선장에게 슬며시 카톡을 보냈다. 시간 날 때 언제든 놀러오란다. “내 장비 다 너 줄 거야”라는 약속을 이번엔 아예 녹취하기 위해서라도 전영태 선생님 모시고 가거도에 다녀와야겠다. 낚시하느라 바빠서 연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애인과 함께 가거도에 가 한 보름쯤 뱃길이 끊겨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러면 가거도야말로 천국일 것이다. 아예 살림을 차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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