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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에세이_ 별 하나에 맛있는 이름 하나
낚시에세이

에세이

 

별 하나에 맛있는 이름 하나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백석은 낚시인들에게도 사랑 받아 마땅하다. “참대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깨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시기의 바다」)는 시에서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야말로 낚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아닌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의 대목에선 선상낚시를 나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꽝조사’의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인다.
물론 1930년대 백석이 왕돌초나 관탈도에 가서 참다랑어 지깅·포핑 낚시를 즐겼을 리는 만무하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청년이 될 때까지 바다를 보지 못했거나 평북 서남부와 인접한 황해를 몇 번 본 게 전부였을 것이다. 1929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서야 처음 대양을 보게 된 백석이 일본 혼슈 지방 가키사키(시기) 어촌의 풍경을 그린 시가 「시기의 바다」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어촌 하숙집에 머무는 시인에게 ‘참치회’란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못 먹어 눈물겨울 정도로 백석은 생선 요리를, 특히 회를 좋아한 모양이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1935년, 백석은 박경련이라는 여인을 우연히 만나 짝사랑하게 되고, 이듬해 그녀의 고향인 통영에 세 번이나 무작정 찾아가는데, 그때 본 통영 바닷가 마을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통영」이라는 시가 대표적이다.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와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이라는 대목에서 전복, 해삼, 파래, 아개미(명태 아가미젓)는 통영을 대표하는 해산물이다. 도미(참돔, 감성돔, 벵에돔, 돌돔), 가재미(도다리), 호루기(호래기), 대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통영 바다낚시의 훌륭한 대상어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타이라바, 구멍찌, 원투, 카고, 카드채비, 지깅, 에깅 등 다양한 낚시 기법으로 잡아내지만 1930년대에는 어떻게 낚아냈을지 궁금하다. 아마 통구밍이(거룻배)를 이용한 그물 조업이나 해바리(해루질), 개막이(물막이 맨손잡기) 등 전통 어로가 성행했을 것이고, 오늘날 선외기 처박기 낚시하듯 근해에 작은 목선 띄우고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만한 미터급 대구를 집집마다 건조했다니, 당시 통영이 얼마나 풍요로운 황금어장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백석은 음식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 그가 쓴 시들에는 ‘참치회’, ‘도미’, ‘가재미’, ‘명태’, ‘꼴뚜기’, ‘칠성장어’ 등 생선 요리가 자주 등장한다. 백석은 생선을 많이 먹어 훌륭한 시인이 됐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생선을 많이 먹는 나도 언젠가는 백석 같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선은 확실히 특별한 식재료다. 손질된 것을 시장에서 사다가 조리하는 경우엔 다른 음식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직접 낚은 물고기의 눈을 바라보며 그 숨을 거두어야 하는 ‘낚시 요리’는 각별하고 애틋한 행위다. 한 그릇 음식이 사람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치열하고 숭고한 생멸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생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소시지나 어묵, 고기반찬이나 먹을 줄 알았지 엄마가 가끔 구워주는 조기, 갈치, 고등어, 삼치는 입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가 낚아 오시는 붕어, 잉어, 메기, 향어, 모래무지, 빠가사리 같은 민물고기는 더더욱 싫었다. 나이가 들어도 입맛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선회의 물컹거리는 식감과 생선구이의 잔가시, 민물매운탕의 흙내가 다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생선 맛에 눈을 뜬 것은 낚시에 매진하면서부터다. 낚시는 내게 손맛의 짜릿함 뿐만 아니라 입맛의 황홀함까지 알려주었다. ‘캐치 앤드 릴리즈’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도 하지만, 낚시의 완성은 잡은 고기를 정성껏 요리해 알뜰하게 먹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물고기에 대한 예우라고 믿는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분주했다. 내 낚시 식도락의 비어 있는 한구석을 채우기 위해 전남 고흥까지 차를 몰고 가는 일이 잦았다. 나는 붉바리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다금바리(자바리)보다 더 맛있다고 하는, 생선회의 귀족이다. 고흥에서는 요즘 붉바리 외수질 낚시가 성행 중이다. 지난해 여수에서 타이라바로 도전했다가 실패한 붉바리낚시인데, 외수질로 방법을 바꿔 재도전에 나섰다.
고흥 거금도에서 출항하는 진바다호를 타고 초도와 백도 주변 여밭 지형에서 채비를 내렸다. ‘다잡아 외수질’이라는 별칭답게 생새우 채비에는 60센티미터가 넘는 개우럭, 따오기 농어, 빨래판 광어, 왕사미 볼락, 8짜급 민어, 쥐노래미, 쏨뱅이, 참돔 등이 낚여 올라왔다. 물론 내가 낚은 것은 아니다. 나는 채비가 내려가자마자 무섭게 달려드는 쏨뱅이들의 성화에 내내 정신 못 차리다가 점심 먹기 전, 50센티미터짜리 붉바리를 낚아내면서 마음 부담을 덜었다. 5짜 붉바리를 확보하고 나니 오후 낚시는 그야말로 크게 앞선 축구 경기의 추가시간이나 다름없었다.
현장에서 피를 뺀 붉바리를 쿨러에 넣고 싱싱하게 서울로 공수해왔다. 회를 뜨고, 초밥을 쥐고, 맑은탕을 끓여 친구 부부와 나눠 먹었다. 친구가 더 좋은 술을 가져왔으면 좋았겠지만, ‘월계관’ 준마이 사케도 나름대로 붉바리와 잘 어울렸다. 붉바리회는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산뜻하면서, 부드러움과 쫄깃함의 밸런스가 적절한 식감이 좋았다. 은은하게 깊은 맛이라고나 할까, 생선회에도 기품이 있다는 것을 붉바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괜히 비싼 생선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낚시 식도락의 오랜 여백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붉바리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던 날들과 작별하게 됐다.
그런데 지난여름 최고의 ‘미식어(美食魚)’는 정작 따로 있었다. 지루한 54일간의 장마와 코로나 대유행으로 일상에서 낚시의 기쁨도, 식도락의 행복도 모두 떠나보내고 우울함에 입맛을 잃어버린 나를 위로해준 것은 잡고기 중의 잡고기로 취급받는 백조기(보구치)였다. 붉바리에겐 좀 미안하다. 매일 신규 확진자가 10명 이하로 발생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가 유지되던 7월 중순, 문학평론가 하응백 선생님과 오천항 밥말리호에 올랐다. 평일 출조라 자리도 넉넉하고 낚시하기 편했다. 마침 잔뜩 낀 구름이 햇볕을 막아줘 쾌적하기까지 했다.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며 100마리 넘는 백조기를 낚아냈다. 그래서 ‘백(100)조기’구나 싶었다. 예년에 비해 씨알이 굵었다. 빠지면 섭섭한 부세조기도 한 마리, 튀겨 먹기 좋은 보리멸도 여러 마리 잡았다.
비늘 치고 굵은소금에 염장한 백조기를 다섯 마리씩 지퍼백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밥반찬으로, 술안주로 조기구이만한 게 없었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조기를 굽고 있노라면 고소한 냄새가 사방 피어오르는데, 내겐 집 나간 며느리도 아내도 애인도 없지만, 하여간 누구라도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런 착각을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조기구이의 감칠맛과 함께 지난 계절을 보냈다. 식욕이 도니 삶에 대한 의욕도 생겼다. ‘집콕’을 기회삼아 열심히 글 쓰고, 다음 학기 강의 준비를 했다.
돌고 도는 낚시철의 순환은 계절만큼이나 성실해서, 나는 냉동실에 백조기가 다 떨어질 무렵 한치를 부지런히 잡아 한 달 먹을 만큼은 저장해뒀고, 한치가 바닥나자 주꾸미 금어기가 해제된 9월 첫날, 밥말리호를 타고 200여 마리의 가을 주꾸미를 낚아왔다. 샤브샤브로, 숙회로, 라면으로 주꾸미를 즐기는 입 안에 내장산 단풍이 드는 느낌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가을, 윤동주의 시를 빌리자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고, “별 하나에 농어와 별 하나에 광어와 별 하나에 갑오징어와 별 하나에 주꾸미와 별 하나에 무늬오징어와 별 하나에 우럭과 별 하나에 삼치, 양태…… 나는 별 하나에 맛있는 이름 하나씩 불러본”다.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이 계절, 나도 여러분도 생선을 못 먹고 눈물겨울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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