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연재 에세이
도전과 탐욕의 새해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새해 두 번째 출조는 부시리, 방어 지깅 낚시가 됐다. 조홍식 박사님께서 모처럼 지깅 낚시가 하고 싶다며 같이 가자 하셨다. 조 박사님은 우리나라에 지깅 낚시를 널리 보급한 선구자이시다. 이번 출조에는 조 박사님뿐만 아니라 수년간 여러 대륙을 다니며 바라문디, 타이멘, 머레이코드, 노란뺨잉어, 파푸안배스 등을 낚아온 해외 원정낚시 전문가 엄일석 군, 그리고 한남낚시에서 일석과 친분을 맺은 김경호 형도 동행했다. 일석은 코로나가 종식되면 자이언트 트레발리를 낚으러 또 한 번 원정길에 나설 예정인데, 그 전까지 연습 삼아 부시리를 대상어로 하는 지깅과 파핑에 몰두할 거라고 했다.
겨울 제주는 좋은 날씨와 좋은 물때를 모두 노려 출조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예보를 보니 1월 21일 목요일 바다 기상이 괜찮아서 “고기도 사람을 무시한다”는 무시 물때임에도 날씨 하나만 보고 출조를 진행했다. 관탈권에서 연일 좋은 조과를 거두고 있는 물곰호 강원우 선장에게 연락해 예약을 잡았다. 출조 전날 애월항 근처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애월조림’에서 고등어조림으로 배불리 식사하고, 숙소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낚시 준비를 했다. 모두 들떠 있었는데, 특히 나와 일석은 잡은 고기를 어떻게 서울로 택배 보낼 것인지, 몇 마리나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10kg 넘는 거 딱 두 마리씩만 일찍 잡고 선실에서 자자고 했다. 나는 내일 회, 초밥, 탕, 수육, 구이까지 풀코스로 요리를 대접하겠다며, 사시미 칼을 숫돌에 갈아왔노라고 큰소리쳤다. 어린 후배들의 들뜬 헛소리에 조 박사님은 “일단 잡고 얘기합시다”라며 우리를 진정시켰다.
다음날 아침, 배에 오르기 전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었다. 그것이 비극의 복선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물곰호에 오르니 우리 말고도 네 분이 더 계셨다. 낚시를 처음 해보는 분들인데, 기름진 제철 대방어를 잡아 회 떠먹을 생각에 들떠 계셨다. 물때가 물때인지라 강원우 선장 얼굴에 불안의 그늘이 드리워져 보였다. 그나마 물이 흐르는 대관탈도와 중뢰의 물골을 노릴 거라고 했다. 두 시간쯤 달려 포인트로 가는 길, 멀미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동풍에 너울이 일면서 멀미가 조금씩 올라왔다. 얼른 아네론 한 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그런데 문제는 엄한 데서 터졌다. 입 구멍을 잘 막았더니 다른 구멍이 지랄이었다. 요즘 섬유질 보충을 위해 차전자피 가루를 먹고 있는데, 이걸 먹으면 뱃속에서 젤리처럼 끈적끈적하게 부풀어서는 장내 온갖 찌꺼기들을 흡착해 함께 배설된다. 그런데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오히려 변비가 생긴다. 전날 아침부터 24시간 넘게 화장실을 못 갔는데, 아침에 먹은 우유가 먼저 화학작용을 일으키더니 멀미약 먹으려고 마신 물이 지하수펌프의 마중물마냥 뱃속에 있는 것들을 뽑아내려 하는 것이었다.
너울에 꼴랑거리는 변기 위에 엉거주춤 중심을 잡고 앉아 하루 넘게 묵은 것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판 잔뜩 거나하게 쏟아냈는데 갑자기 엉덩이가 차가웠다. 뭐지, 파도인가? 했는데 변기물이 역류하면서 똥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더러워 죽겠다. 독자들과 강원우 선장께 죄송할 따름이다. 물 내림 스위치를 변기에 앉을 때부터 계속 켜놨어야 하는데, 일을 마치고 나중에만 켜면 되는 줄 착각한 탓에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변기뚜껑을 닫고, 황급히 물 내림 스위치를 켜고, 휴지를 잔뜩 뜯어 수습에 나섰다.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지만 휴지와 생수와 화장실에 비치된 방향제 등을 이용해서 어찌어찌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엉덩이와 손과 팬티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정리했다. 내가 나오자마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조사분께서 화장실을 썼는데, 볼일 본 후 상쾌한 표정으로 나오시는 걸 보니 방금 전까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이 얘기는 일행들에게도 안 했다. 이 지면을 빌려 처음 한다.
냄새 나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다시 낚시로 돌아가야겠다. 예기치 못한 동풍에 너울은 세게 일고, 조류 흐름은 전혀 없어서 부시리들의 활성도가 지극히 낮은 상황, 세 시간쯤 지나서야 선수 쪽에서 낚시하시던 조홍식 박사님께 첫 입질이 왔다. 힘차게 끌어낸 녀석은 옆구리에 교통사고로 바늘이 걸려 올라온 알부시리였다. 그 한 마리를 걸어 올리시고는 베테랑 앵글러인 조 박사님도 멀미를 못 견뎌 선실에 누워버리셨다. 선실 안에는 이미 아침에 먹은 햄버거를 다 게워낸 김경호 형, 그리고 저쪽 팀 네 분 전원이 바다에 갈매기밥을 실컷 주고는 진작 드러누워 있었다. 엄일석 군도 오후가 돼서는 멀미가 심해져 선실에 누웠다. 나는 아네론 멀미약이 효능을 발휘한 데다 속엣 것들을 시원하게 배출해내선지 컨디션이 돌아와서, 거의 독선이나 다름없는 편안한 환경에서 부지런히 로드를 흔들었고, 알부시리 한 마리와 작은 삼치 한 마리, 그리고 철수 1분 전 미터급 대삼치를 걸어내는 소소한 쾌거를 올렸다.
이날 배에서 나온 조과는 총 다섯 마리. 조 박사님과 내가 낚은 부시리 두 마리, 강원우 선장이 낚은 부시리 한 마리, 그리고 내가 낚은 삼치 두 마리였다. 잡은 고기 손질해서 택배 어쩌고 하는 흰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그래도 종일 고생한 일행들에게 전날 약속한 회와 초밥, 수육, 탕, 구이를 맛보여줄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숙소로 돌아와 조 박사님이 일행 전부의 낚시 장비를 세척하고, 일석과 김경호 형이 장 보러 다녀오는 사이 나는 대삼치 회를 뜨고, 부시리 초밥을 쥐고, 삼치와 부시리 대창, 간 등 내장을 데쳐 수육으로 만들고, 대가리와 가마살, 서더리 등 구이와 매운탕 재료 손질을 마쳐놓았다. 그 전에 물론 샤워를 해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회와 초밥과 내장수육과 삼치구이, 매운탕이 조화를 이룬 거나한 저녁상에 다들 감탄했다. 기름이 잔뜩 오른 대삼치회는 진미 중의 진미였다. 그날 밤늦도록 배 터지게 먹으면서 좋은 물때에 지깅 복수혈전을 하자 다짐했고, 티브이로 ‘007 여왕 폐하 대작전’을 보면서 007 마니아인 조 박사님으로부터 007 시리즈의 온갖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그야말로 소년들의 겨울방학이었다. 다음날 아침엔 남은 회와 채소와 밥을 냄비에 다 털어 넣고 참기름과 초장을 잔뜩 둘러 회덮밥을 해 먹었다. 꿀맛이었다. 부시리 입질은 아쉬웠어도 사람 입질은 대박이었던 새해 첫 지깅 조행, 물곰호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