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연재 에세이
떠돌이 낚시 유랑단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친일행적으로 욕을 먹지만,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이 절창의 노래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방랑자로서의 자기 고백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쓰고는 친일과 독재정권 미화로 얼룩진 부끄러운 평생을 정말 하나도 뉘우치지 않은 미당은 언행일치의 나쁜 표본이라 할 만하다.
대뜸 서정주의 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을 “서른여덟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낚시다”라고 바꾸기 위함이다. “낚시터는 가도 가도 즐겁기만 하더라…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패러디하고는 마음 어딘가가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낚시인들은 대개 방랑자다. 크라잉넛의 ‘서커스 매직 유랑단’ 노랫말처럼 “한 많은 팔도강산 유랑”하며 “떠돌이 인생역정”을 즐기는 ‘유랑 낚시단’이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 와이프에게 ‘낚시 정기권’을 발급받아 낚시를 가는 모범적인 남편들은 떠돌이가 아니다. 물고기로 치자면 그들은 모천회귀 본능을 지닌 연어나 은어에 가깝다. 또는 서식지에서 거의 이동하지 않으면서 일생을 보내는 놀래미나 볼락 같은 정착성 어종이라 할 만하다. ‘유랑 낚시단’에 해당하는 낚시인들은 적정수온을 찾아, 먹잇감을 찾아 대양을 쏘다니는 회유성 어종이나 마찬가지다. 대상어를 따라서, 손맛을 좇아서 머나먼 방랑을 마다 않는 그들은 삼치, 부시리, 전갱이 같이 활동범위가 넓고 이동 속도가 빠르다.
일러스트_탁영호
계절의 여왕 오월을 맞아 내가 바로 한 마리 등 푸른 생선이 되었다. 수온이 상승하고 물고기들의 활성도가 오르면서 강으로 호수로 바다로 거침없는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지난 4월 한 달간 매주 섬진강에 쏘가리 낚시를 다닌 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물론 그때도 꽤 많은 이동거리를 누볐다. 한창 부지런히 낚시 다녀야 할 봄 시즌에 내 차는 타이밍벨트가 끊어지며 엔진을 때려 엔진과 미션, 타이밍벨트까지 들어내는 대형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수리가 진행되는 3주 동안 친구가 덕을 베풀었다. 평소 3분 거리 출퇴근용으로만 굴리던 차를 선뜻 내준 것이다. 차 수리가 완료되는 날, 친구 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세차까지 해서 반납했지만 미안했다. 친구는 1년 운행거리 4000km를 넘지 않으면 자동차 보험금 30만원을 환급받는 ‘에코 마일리지’ 특약에 가입했는데, 2000km나 타고 차를 돌려줬으니 내가 나쁜 놈이다.
오월 낚시 유랑의 첫 테이프는 제주도 지깅으로 끊었다. 5월 3일 월요일 14물에 압둘라호를 타고 대관탈도 부근으로 나가 조류 흐름이 약한 악조건 가운데 하루 종일 낚싯대를 흔들어 제끼면서 간신히 부시리 두 마리 끌어올렸다. 제주에서 올라오자마자 5월 5일 어린이날, ‘소년기’라는 노래를 부른 인디밴드 ‘놀플라워’ 멤버들과 충북 옥천 금강 일대로 끄리를 잡으러 갔다. 지수리 청동여울에서 힘 좋은 바디끄리 몇 마리 잡고는 등나무가든 민박에서 하룻밤 자고 금산 원골에 가 어죽과 도리뱅뱅이 먹고 올라왔다. 다음날 5월 7일, 김포공항에서 다시 제주행 항공기에 올랐다. ‘전조선문학가조사동맹’의 문학평론가 하응백 선생님, 문학기자 조용호 선생님, 선문대 여영현 교수님과 물곰호를 타고 선상 돌돔처박기낚시를 하기 위해서다. 조과가 어땠는지는 쓸 수 없다. 6월호 원고 마감일을 앞둔 5월 6일, 금강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5짜 돌돔 한 마리쯤 잡지 않았을까?
제주 돌돔낚시를 다녀와선 5월 11일 밤, 낚시의류업체 ‘잔카’ 스탭들과 유튜브 촬영을 위해 완도에 가 히트마시호에 오른다. 19일부터 20일까지는 연평도에 가 부경호를 타고 루어 캐스팅으로 대물 점농어를 노린다. 그리고 22일부터 26일까지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에 간다. 내 문학과 낚시의 은사이신 문학평론가 전영태 선생님께서 이 에세이를 애독하시는데, “요즘 조과가 형편없어선지 자네 글이 영 재미가 없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글감을 건지러 나랑 가거도에나 다녀오자우”라고 전화를 주셨다. 가거도 엔젤피싱 박현우 선장에게 물어보니 요즘 타이라바에 농어가 막 올라오고, 갯바위에서 씨알 굵은 볼락이 왕창 쏟아진다고 한다. 가거도 조행기는 다음 7월호 지면에서 생생히 다룰 예정이다.
골프 치는 사람들이 라운딩을 통해 비즈니스나 인간관계를 도모하듯 낚시인들은 낚시로 사람을 사귀고, 우정을 다지고, 인생의 중요한 행로를 설정하기도 한다. 낚시를 한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주변에는 낚시 친구뿐이다. 동호회 동료들, 낚시를 가르쳐준 선배들, 선장들, 낚시하는 문학인들, 낚시하는 사회인야구인들, 낚시하는 음악가들, 낚시하는 방송인들, 수 년 동안 강제로 낚싯대를 쥐어줬더니 이젠 제법 취미로 즐기는 죽마고우들…… 그들과의 낚시 약속으로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빼곡하다. 낚시를 하러 가면서 다른 낚시 계획을 잡고, 낚싯배에 타고 있으면서 또 다른 낚싯배 예약을 한다. 집에서 자는 날보다 외박하는 날이 더 많다. 이럴 바에야 집을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공유업으로 활용하는 게 낫겠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섬에서 섬으로 오가는 교통비와 숙박비, 식비, 채비 비용도 만만찮다. 하지만 불나방처럼 낚시에 미쳐 쏘다니면서도 할 일은 한다. 원고도 쓰고, 강의도 하고, 이런저런 심사도 보며 밥벌이를 한다. 마침 코인 투자한 것도 조금 올라서 지갑을 메워주고 있다. 다만 여자 만날 시간이 없다. 연애를 좀 해보려 해도, 썸이라도 타보려 해도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 여자가 보기엔 다 똑같은 낚시니까, 지깅이니 타이라바니 계류낚시니 흘림낚시니 에깅이니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시킬 수가 없다. 그렇게 떠나보낸 여자들이 10단 카드채비를 한 번 담글 때마다 우르르 올라오는 열기 떼만큼 많다. 장담컨대 나는 낚시를 하면서 물고기보다 여자를 더 많이 놓쳤다.
아아, 나를 노총각으로 키운 건 팔 할이 낚시다! 물고기를 쫓다가 물고기 신세가 된 나를 주변 사람들은 어물전에 널브러진 생선마냥 측은하게 바라보지만,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연애는 해도 해도 외롭고,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지만, 낚시는 해도 해도 재밌기 때문이다. 올 여름 붉바리 외수질낚시에 쓸 장구통 릴과 선상 낚싯대를 방금 주문 완료했다. 자, 어쩔 테냐? 내겐 눈치 볼 와이프도, 애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