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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연재_에세이] 환상적인 가거도
낚시에세이

[연재_에세이]



환상적인 가거도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잔카, 아이마루베이트 필드스탭.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지난 7월호에 ‘폭발적인 가거도’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는데, 이번 9월호에는 ‘환상적인 가거도’다. 이쯤 되면 가거도 홍보대사냐고 의심 받을 지도 모른다. 앞에 조홍식 박사님이 쓰신 가거도 조행기가 있음에도 에세이 지면에 가거도를 또 등장시키는 것은 그만큼 황홀한 출조였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 너그러이 봐주시리라 믿는다.


7월 10일 토요일 아침 8시 10분, 조홍식 박사님, 엄일석 군과 목포 여객선터미널에서 가거도행 페리에 올랐다. 나는 아직 원도권에 가보지 않은 주변 낚시인들, 특히 내 또래 루어 앵글러들에게 꼭 가거도에 가서 낚시 해볼 것을 자주 권한다. 대상어가 크고 개체수가 많은 낚시 환경도 중요하지만, 서울에서부터 한 여덟 시간 걸려서 도착하는 강행군을 비롯해 온갖 낚시 짐들을 챙기고, 그걸 배에 싣고 내리고, 가서 악천후로 한 며칠 섬에 갇히기도 하는 과정들이 ‘선 굵은 낚시’라고 생각돼서다.

올 여름 충주 삼탄은 쏘가리 낚시인들로 붐볐는데, 한정된 포인트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다툼도 많이 발생했다. 그런 협소한 낚시 환경을 벗어나서 원도권의 스케일 큰 낚시를 경험해보면 가슴이 웅장해질 거라고 나는 말하곤 한다.


순항하던 여객선은 태도 지나면서부터 꼴랑대는 너울에 바이킹이 됐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엄일석 군은 이미 수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속을 게워내 넉아웃 상태가 돼 있고, 조홍식 박사님도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이 정도 가지고 왜들 저러나’ 슬쩍 미소 짓는 순간 속이 꿀렁꿀렁거리는 게 나도 심상치가 않았다. 재빨리 바닥에 누워서 멀미를 막았다.

그러는 동안 배는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갔고, 찌낚시인들의 밑밥통이 뒤집어져서 배 안에는 구린내가 진동했다. 그 냄새에 멀미가 더 심해져 우웩거리며 오바이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흡사 고전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풍랑 속을 헤치며 크레타섬으로 향하는 여객선의 아수라장을 떠올리게 한 항해는 무사히 가거도항에 닿았다.


짐을 다 풀지도 않고 식사조차 거른 채 조 박사님과 엄일석 군은 숙소에 그대로 드러누웠고, 나는 엔젤펜션의 농어조림과 된장찌개로 속을 든든히 채운 뒤 의욕이 넘쳐 홀로 갯바위에 내렸다. 농어 몇 마리 잡고 왔더니 일 행들이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해 있었다. 농어회를 안주 삼아 소맥 몇 잔 나눠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거도에서 한 일주일 낚시하면 삶이 단순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먹고, 낚시하고, 점심 먹고, 낚시하 고, 저녁 먹고 잔다. 또 일어나 밥 먹고, 낚시하고, 밥 먹고, 낚시하고, 밥 먹고 잔다. 낚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그 천국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조홍식 박사님도 엄일석 군도 나도 모두 쌩쌩했다. 아침 먹고 큰간여에 내렸다. 포말이 천둥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너울이 사정없이 달려드는 갯바위에 나란히 서서 쇼어 캐스팅 게임을 했다. 씨알 좋은 농어들이 연달아 물어줬고, 메탈바이브를 던지면 부시리가 걸려나왔다. 파도를 피해 높은 갯바위에 선 관계로 랜딩할 때마다 아주 애먹었다. 뜰채도, 갸프도 별 소용이 없어서 결국은 파도에 흠뻑 젖어가며 물 가까이로 내려가 손으로 끌어올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서로 우스워 한참 웃었다.







오후엔 도시락을 챙겨 오간여에 내려서는 야간 볼락낚시를 했다. 자정까지 입질 한 번 못 받다가 베이트피시들이 집어등 불빛으로 피어오르면서 볼락 피딩이 시작됐다. 씨알 좋은 볼락들이 일타일피로 올라왔다. 캐스팅해서 끌어올 때 덜컥, 푸다닥 하는 입질도 짜릿했지만 발밑 직벽 구멍에다 루어를 집어넣고 고패질하는, 그야말로 구멍치기, 돌틈낚시로 왕사미 볼락을 주구장창 뽑아내니까 정말 신났다. 여름방학에 아버지 따라서 갔던 홍천 밤벌에서 멍텅구리채비로 마자, 모래무지, 빠가사리 잡던 추억이 새삼 떠올랐다.


낚시는 신나게 했는데, 밥 먹고 아무데나 뒀던 보온도시락통 두 개를 그만 너울에 잃어버렸다. 아침에 철수해서는 선장 형수님께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 너그러운 형수님은 그럴 수도 있다면서 변상하라 하지 않았다. 한숨 자고 일어난 오후, 선상 캐스팅 빅게임에 나섰다. 펜슬을 던지는 족족 부시리와 방어들이 쫓아오다가 퍽퍽 때렸다.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지난 두 번의 제주 지깅 출조에서 제대로 손맛을 못 봤던 우리 일행은 가거도에 와서 한을 풀었다. 잡다가 잡다가 지쳐서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선장 박현우 형한테 통사정을 했다.


그날 저녁엔 부시리 대창 볶음을 안주 삼아 현우 형과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가거도 뉴엔젤호 선장 박현우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인데, 10년 전쯤 목포에서 장가갈 때 주례를 선 분이 이 에세이 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나의 은사, 문학평론가 전영태 선생님이시다. 현우 형에 따르면 전영태 선생님은 목포예식장의 전설로 회자되는데, 주례사를 무려 50분 동안이나 해서 다음 예식이 엄청 밀렸단다. 특히 “신랑 이 ×× 놈이 선장이라서 내가 주례사를 잘해야 좋은 포인트 내려줄 게 아니냐”고 하시는 바람에 예식장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각설하고, 우리의 마지막 낚시는 돌돔 찌낚시였다.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이 낚시를 한 덕분에 ‘환상적인 가거도’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찌낚시에 서툰 루어꾼들이 엉성한 장비를 주섬주섬 챙겨서는 갯바위에 내렸다. 출발할 때 목포에서 사온 갯지렁이가 다행히 싱싱했고, 어설프게나마 파우더에 크릴도 섞어 밑밥을 갰다. 마침 우리가 엔젤펜션에 머무는 동안 FTV ‘아트 오브 피싱’ 진행자인 찌낚시 명인 진상현 프로가 와 있어서 채비와 낚시 요령 등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조과는 그야말로 대박. 3시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조 박사님과 나 둘이서 돌돔 40여 마리를 잡아 쿨러를 가득 채웠다. 엄일석 군은 루어로 농어와 부시리를 잇달 아 건져냈다. 오전 낚시만 하고 철수해서는 4짜 돌돔 두 마리를 회 쳐서 낮술을 실컷 마셨다. 엔젤펜션 식당 화이트보드에 주류 매상을 바를 정(正)자로 표기하는데, 4박 하는 동안 총 26병을 마셔서 여러 팀들 중 1등 했다. 그것도 손맛 많이 본 것만큼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날 오후 배로 우리는 가거도를 떠났다. 가거도를 떠나기 전 박현우 형에게 국산 낚시 의류 브랜드 ‘잔카’ 의 낚시복 세트를 선물로 줬다. 의용소방대 옷을 입고 내가 선물한 모자를 쓴 현우 형이 여객선에 손수 짐을 실어주며 우리를 배웅했다. 엄일석 군은 이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박사과정에 가 몇 년 간 공부하는데, 일석 군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어 참 감회가 남다른 조행이었다. 일석 군이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올 때마다 우리는 가거도에 가기로 했다. 그땐 맛있고 귀한 돌돔과 왕볼락만 잡자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조 박사님 도 일석 군도 이미 가거도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목포예식장 주례사 이야기를 적다보니 선생님, 나의 선생님! 존함을 빨리 부르면 ‘저녁때’고, 호는 ‘한병더’인 전영태 선생님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마침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자 국내 최초, 최대 장어낚시 커뮤니티인 ‘원줄이 끊어질 때까지’의 운영자인 전웅기 형이 논현동에 ‘유나기’라는 나고야식 장어덮밥집을 열었으니 거기서 마셔야겠다. 일본어 ‘유나기(ゆうなぎ)’는 저녁때, 저녁뜸이라는 뜻이니 곧 전영태 선생님을 가리킨다. 가거도 뺀찌 몇 마리, 볼락 몇 마리 가져가서 장어와 함께 구워달라고 해야겠다. 지나간 모든 낚시는 추억담 속에서 언제나 생생하니까, 다녀오자마자 벌써 그리운 섬, 환상적인 가거도를 위해 건배하면서 술잔을 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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