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연재_에세이]
갈치 부자 되세요
이병철
가정에서 늘 구박 받는 존재인 낚시꾼이 집안의 슈퍼 히어로가 되는 계절이 왔다. 바야흐로 갈치낚시 시즌이 된 것이다. 주말마다 낚시하느라 산간벽지 도서지방으로 나돌고, 가서 외박하고, 비린내 풍기며 집에 들어오는 낚시꾼 남편을 향해 경멸스런 눈빛을 보내던 아내도 은빛 휘황찬란한 생물 은갈치 앞에서는 두 눈이 하트 모양이 된다.
참돔이나 광어, 우럭, 쏘가리, 심지어 무늬오징어나 한치 싫어하는 사람들은 봤어도 갈치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다. 구이로, 조림으로, 갓 잡은 것은 회로, 갈치국으로, 작은 것들은 삭혀서 젓갈로 먹는다. 김장할 때풀치를 썰어 넣으면 나중에 숙성된 김치 맛이 시원하면서 쿰쿰하고 또 달큰하면서 구수하고…… 하여간 끝내준다. 겨울철 참돔 타이라바 낚시하러 사계항에서 출항하는 압둘라호에 타면 장진성 선장이 떡만둣국과 함께 직접 담근 풀치 김치를 내주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라면에 곁들이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맛있고 귀하고 비싸기에 갈치는 은근히 갈등을 조장하는 생선이다. 그래서 ‘갈’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애인과 제주도 여행 가서 한 마리에 10만원 훌쩍 넘는 통갈치 구이를 차마 사 먹지 못하고 그냥 세 토막에 2만원짜리 먹었다가 ‘짠돌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언젠가는 목포에 친구 넷이 놀러가서 갈치조림을 먹는데 한 젓가락에 몸통 두 토막이나 건져가는 친구놈의 탐욕스러움을 지적했다가 다툼이 일었다. 내가 그놈을 ‘포크레인’, ‘메뚜기 떼’, ‘야만인’, ‘식충이’, ‘하이에나’, ‘길고양이’ 등등 원색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갈등을 겪으면서 나는 한 깨달음을 얻었다. “갈치는 사 먹는 게 아니라 잡아서 먹는 것”이라는 심오한 도에 눈을 뜬 것이다.
갈치낚시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다수확을 보장하는 건 다단채비에 생미끼를 달아서 내리는 채낚기낚시다. 이건 낚시라기보다 어업에 가깝다. 쉴 틈 없이 꽁치나 풀치 미끼를 썰어서 바늘 열 개에 달아 줄을 내리고 전동릴로 감아올리고를 밤새도록 반복하면 낚시의 즐거움보다는 어업의 고된 피로가 몰려온다.
어마어마한 조과를 올릴 수는 있지만, 상황에 맞는 채비와 기법을 연구해 한 마리씩 낚아 내는 메탈지깅이나 텐야낚시의 오밀조밀한 재미를 따라올 수는 없다. 많이 잡는 게 목적이라면 채낚기를 하면 된다. 하지만 수십킬로씩 잡아 어디 내다 팔 것도 아니고, 그저 엄마나 몇 마리 갖다 주고 나 혼자 실컷 먹으면 그만인 나로서는 재밌는 낚시를 하기 위해 100~130그램 메탈지그를 챙겨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8월 22일 일요일 제주 공항은 한산했다. 제주 지역에 거리두기 4단계가 적용되면서 여행객이 줄기도 했고, 휴가철 또한 끝물이었다. 가을장마답게 오후 내내 굵은 비가 쏟아져 공항은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까지했다. 한치 시즌에 한 300마리 잡겠다면서 바퀴도 안 달린 94리터 대장쿨러를 끙끙거리며 들고 다니던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40리터짜리 쿨러를 새로 장만했다. 바퀴 달린 제품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쿨러를 끌고 걸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갈치를 잔뜩 잡아가겠다는 내 열정을 꺼뜨릴 수 없었다. 비는 오지만 파도나 바람은 잔잔해서 출조하는 데는 문제 없었다. 화북항에서 출항하는 해성피싱호를 예약해뒀다. 사무장께서 승합차를 몰고 공항으로 픽업을 나와 주셨다. 화북항까지 가는 동안 비는 더거세졌다. 항구에 도착해 우중전을 각오하고 우비를 꺼내 입었다.
구면인 해성피싱호 김상근 선장님과 인사하고, 최근에 낸 사진 에세이집 <사랑의 무늬들>을 선물로 드렸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말랑말랑한 감성 에세이인 이 책은 뜻밖에도 낚시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다들 제목에서 무늬오징어를 떠올린 까닭이다.
특히 “통영 사랑도의 무늬오징어”라면서 요즘 팁런에깅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통영권 선장들이 반기고 있다. 각설하고, 출항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30여분을 달려 포인트에 도착했다. 물돛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다시 내리는데 조금 시간이 소요됐지만, 아직 날이 환해 서둘러 낚시하기보다는 채비를 견고히 준비하는 데 집중했다.
곧 집어등에 불이 켜지고, 120그램짜리 오렌지색 메탈지그를 90미터 바닥까지 내린 후 20미터 수심층까지 감아올리면서 어군 탐색을 했다.
60미터권에서 첫 입질을 받았다. 2지급 되는 풀치였다. 서서히 집어가 되기 시작해 40미터까지 갈치들이올라왔다. 40미터권에서 계속 갈치를 뽑아 올렸다. 그런데 씨알이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메탈지그를 줄무늬 없는 보라색으로 바꿨더니 씨알이 좀 나아졌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풀치만 올라오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타이라바할 때 쓰던 오색합사를 그대로 사용했더니 갈치인지 삼치가 중간에서 원줄을 자꾸 끊어먹었다. 심지어 ‘드래곤’이라 부를 만한 대물 갈치를 수면까지 거의 다 올렸는데, 원줄이 맥없이 끊어져 놓치기까지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갈치낚시를 하다보면 눈이 자꾸 옆으로 돌아간다. 저쪽에서 더 굵은 갈치를 잡진 않는지, 한치나 고등어 같은 반찬거리를 잡진 않는지 유심히 관찰하다보면 불현듯 힌트를 얻게 된다. 반대편 선수에서 풀치를 썰어생미끼 낚시를 하는 커플 조사 두 분께서 최소 4지급 씨알 굵은 갈치를 연거푸 뽑아내고 있었다.
채비를 보니 제주 한치낚시의 첨단 조법으로 각광 받은 ‘오모리그’를 갈치에 적용한 것이었다. 서둘러 풀치 몇 마리를 썰고, 채비를 교체했다. 합사 1호에 50파운드 쇼크리더를 직결한 후 삼각도래에 20호 봉돌을 달았다.
태클박스를 뒤져보니 볼락용 10그램짜리 지그헤드가 있길래 50파운드 라인을 가짓줄로 묶고 볼락 지그헤드에 갈치 트레블훅을 결합한 ‘묻지마 채비’를 만들어 오모리그를 시도했다.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허접한 채비에도 갈치들은 덤벼들었다. 하지만 후킹 미스가 잦았다. 그 모습을 본 김상근 선장이 갈치 전용바늘을 줬고, 덕분에 준수한 씨알의 갈치를 여러 마리 올릴 수 있었다. 최종 조과는 55마리. 올해 첫 갈치지깅으로는 그래도 좋은 조과였다.
이날 낚시하는 동안 해성피싱호는 ‘국내 최고 선상 맛집’이라는 수식어답게 환상적인 식사를 선보였다. 제사상에 올리는 제주 전통 음식인 흑돼지산적을 푸짐하게 구워 내주더니 모카크림빵과 아이스 아메리카노후식까지 제공했다. 출출한 심야에는 짜파게티를 끓여주기도 했다. 입항 후 아침 비행기를 타는 손님들을공항까지 픽업해주는 완벽한 서비스는 감동 그 자체였다.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수속을 한 후 비행기에서 곤히 잠들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신림동 엄마 집으로 차를 몰고 가 엄마에게 갈치 40마리를 드렸다. 시장에서 비늘 벗겨진 먹갈치만 보다가 은빛 번쩍번쩍한 생물 은갈치를 보니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먹을 것 열다섯 마리를 챙겨 집에 와 내장 손질하고토막 내 냉동실에 넣어놓으니 마음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저녁에는 옛 애인과 통갈치 구이 못 사먹은한을 풀듯 두툼한 갈치 여섯 토막을 구워 혼자 다 먹었고, 다음날에는 목포에서 친구와 다퉜던 일을 떠올리면서 감자와 무 위에다 갈치를 산처럼 쌓아올린 갈치조림을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포만감에 젖어 생각했다. ‘갈치를 배터지게 먹는 것은 곧 부의 상징이 아닌가’라고. 낚시는 부자 되는 지름길이다. 낚시인 여러분올 가을 모두 갈치 부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