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평산의 한 뼘 다가가는 붕어낚시 85]
한 해를 보내는 덕담
釣而不網조이불망과 不釣勿網부조물망
그리고 放生방생
송귀섭 FTV 제작위원, ㈜바낙스 고문, FTV 붕어낚시 프로그램 진행(2002~2024, 현재 낚시선비프로그램 진행), 낚시잡지 연재(1998~2024 현재, 낚시춘추, 월간 붕어낚시, 월간낚시21), 저서 <붕어낚시 첫걸음> <붕어 대물낚시> <붕어학개론>
질문 1 조이불망 그리고 부조물망의 의미와 차이는?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가는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낚시철학의 근간이 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낚시 생활을 하면서 공자님이 가르쳤다는 조이불망(釣而不網)에 관한 내용을 많이 보았고, 그 뜻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나름대로 참 낚시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조이불망과 유사한 부조물망(不釣勿網)이라는 사자성어를 보았습니다. 낚시와 관련해서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철학 용어 같은데, 어디를 찾아보아도 제가 이해할 만한 설명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이 두 가지 사자성어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철학이 담겨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질문 2 방생한 물고기가 살 수 있나요?
낚시하다 보면 붕어나 다른 어류들이 낚싯바늘을 삼켜서 목구멍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나오지도 않는 바늘을 빼기엔 무리라고 생각해 그냥 목줄을 잘라서 방생하는데요, 그렇게 방생하면 어류들은 죽거나 안 죽더라도 목구멍에 평생 바늘이 박힌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아니면 조금 무리를 해서 상처가 나더라도 바늘을 빼서 방생하는 게 맞는 것일까요? 참고로 방송에서 방생하는 것은 보여주기식 행동이 아닌가요? 제 생각으로는 어차피 다 죽을 것 같아서 묻습니다.
질문자 : 花津浦(화진포) 2009.11 15(팬카페 평산가인 질의응답 중)
유사내용 질문 : 오도제 외 16명(질문 집계기간 2002~2024년, 팬카페+블로그+SNS
붕어를 낚아내고 있는 필자. 낚은 직후 바로 방생하기에 살림망은 사용하지 않는다.
낚은 직후 붕어를 방류하고 있는 필자.
질문 1 조이불망 그리고 부조물망의 의미와 차이에 대한 답변입니다.
인류의 자연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인간은 일정량의 자연을 누리고 살 권리를 갖고 살면서 동시에 자연을 보전해야 할 의무를 지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대자연 속에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하늘이 부여한 원초적인 권리와 의무이지요. 또한 대자연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면서 자연보존(自然保存 nature preservation)을 하는 것은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에게 부여한 하늘의 섭리입니다.
필자가 여기에서 <모든 생물>이라 함은 동물과 식물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살고 있는 각자의 처지에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서로 먹고, 먹히고, 혹은 의존하고 보호하는 상호작용으로 자연보전을 하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고귀함과 자연생태계의 섭리(攝理)에 따라 보호(保護 natureprotect) 하는 것에는 구분과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保存 : 잘 간수하여 남아있게 함, 保全: 온전하게 잘 지키거나 유지함, 保護: 잘 지키고 보살핌)
따라서 낚시 혹은 수렵(狩獵)이나 채집(採集)을 하면서 동물 또는 식물을 취(取)하는 행위는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최소한으로 부여된 권리이겠으나, 자연보전(自然保全)을 위해서 잡은 짐승이나 물고기 중 일부를 방생하고, 산이나 들의 식물을 필요한 만큼만 선별적으로 채집하고 보호(保護)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갖는 의무이지요. 그러므로 낚시인이나 산행인이 몽땅 다 취하지 않고 적절히 남겨두는 것이 자연인으로서 성숙한 모습이고, 만물의 영장다운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대자연의 품속에서 힐링(healing)과 웰빙(well- being) 생활을 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자연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지탄받기도 하고요. 특히 낚시 분야는 태초부터 인류가 해 온 생활의 일부임에도 물고기를 잡는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호불호(好不好)의 정도가 크고 논란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즐기는 낚시에 대하여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의 대표적인 입장을 중심으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보겠습니다.
유가(儒家)-조이불망 익불사숙(釣而不網 弋不射宿)
이 문장은 논어(論語)의 술이(述而)편에 있는 글귀로서 공자(孔子)가 가난했던 시절에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를 지내기 위해서 낚시나 사냥을 하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述而 7편 26장 子釣 而不網, 弋不射宿)풀이하자면 ‘공자께서는 낚시는 하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사냥은 하되 잠자는 새에게는 주살을 쏘지 않았다’입니다.
인터넷에서 보면 간혹은 익불(弋不射宿)을 과불사숙<戈不射宿)으로 써놓는 경우가 있는데, 주살 弋(익)자 대신에 창 戈(과)자를 쓴 것이지요. 그러나 쏠 사(射)자와 맞는 글자는 주살弋(익)이고, 창 戈(과)자를 쓴다면 쏠 射(사)자가 아니라 던질 投(투)자를 써야 할 것입니다. 창은 활로 쏘는 것이 아니고 손으로 던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 <子>는 공자(孔子)를 말하며, 모든 글귀 앞에 <子曰>은 공자(孔子) 가라사대 즉 말씀을 뜻하고, <子>는 공자의 사상과 품성 그리고 행동을 표현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子 釣而不網, 弋不射宿>의 의미는 공자가 말로써 가르쳤다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니, 공자가 대자연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과 대자연에 대한 윤리적인 보전(保全)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글귀는 공자의 이러한 사려 깊은 행동에 대해 후세 남송(南宋)시대의 홍적(洪適)이 표현해 놓은 것을 주자(朱子)가 논어집주(論語集注)에 정리한 것인데, 이 두 사람은 공자보다 600여 년 후대의 학자이니 홍적이나 주자나 이것이 공자가 말로써 가르친 것인지 그냥 그렇게 한 행동인지를 정확히 보고 들은 바는 아니겠으나, 논어에 있는 글귀로만 보고 풀이하자면 이 문장의 <子>가 뜻하는 것은 <공자께서 말하기를, 혹은 가르치기를>이라고 해석하면 안 맞고 <공자께서는>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필자 註)
어떻든 유가(儒家)의 성인(聖人)인 공자가 선지자(先知者)로서 대자연을 대하는 모습을 나타내주는 이 글귀에서 우리가 따라야할 점은 대자연을 누리고 사는 인간으로서 의 도리(道理)와 살생유택(殺生有擇) 그리고 자연보전(自然保全)과 공존윤리(共存倫理)에 맞는 낚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거듭하지만 물고기를 많이 잡으려고 욕심을 내는 것은 낚시의 도가 아닙니다. 낚시인은 올바른 낚시행위를 통해서만 물고기를 낚는 낚시를 해야 하지요. 주낙을 놓거나 투망을 하거나 기타 편법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낚시인의 도리가 아닙니다. 논어에 있는 공자의 조이불망(釣而不網 弋不射宿)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가(佛家) : 부조물망 불희어명(不釣勿網 不戱魚命)
그렇다면 불가(佛家)의 입장이라면 어떠할까요? 불가의 입장은 부조물망 불희어명(不釣勿網 不戱魚命)입니다. 즉 ‘낚시질도 하지 말고 그물질도 하지 말 것이며, 물고기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하지 말라’ 입니다. 이는 낚시를 즐기는 행위 자체가 안 된다는 것으로, 불가오계(佛家五戒)의 첫 번째 덕목이 불살생(不殺生)으로 살생과 육식을 금(禁)하는 불가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불가오계佛家五戒: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
불가에서는 육식(肉食)을 하지 않고 채식(菜食)만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취하는 육식과 채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육식은 살생을 해서 얻는다는 것이고, 채식은 살생이 아니라 채취해서 먹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근본 논리로는 육식은 개체의 생명을 죽여서 취하는 것이고, 채식은 개체의 잎이나 열매 그리고 줄기나 뿌리의 일부를 취함으로 개체는 보전이 된다는 것이지요.
필자의 생각으로 우리 인류는 태초부터 육식과 채식을 겸해서 먹도록 진화를 해왔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생명을 죽인다는 개념의 살생(殺生)과 식생활(食生活)로써 육식의 개념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는 식물도 감성(感性)을 갖는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식물 중에는 동물을 사냥하는 감각을 지닌 식충종(食蟲種)도 있지요. 그러니 생명 존중의 진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구분 없이 세상 만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연보존(自然保存)을 따르자면 동물뿐만 아니라 풀 한 포기, 씨알 한 낱알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다만 인간이 생존하면서 취하는 최소한의 자연혜택(自然惠澤)은 누리되,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여 그 생명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스스로 낚시를 즐기려니 불가의 철학을 벗어나는 사고(思考)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대자연에서 낚시를 즐기는 취미생활은 단순히 물고기의 목숨을 가지고 희롱(戱弄)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자연의 일부를 취하거나 즐기면서 대자연의 구성원으로서 타고 난 모습대로 여여(如如 tathata 본연 그대로)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단순한 살생(殺生)이 아니라 자연인 본연의 모습이라는 얘기지요. 그러니 낚시를 즐기되 물고기 목숨을 가지고 함부로 희롱하는 장난 낚시를 해서는 안 되고, 물고기와 어울려서 노니는 조락(釣樂)의 낚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쩌면 유가나 불가의 자연 철학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살림망 속의 붕어들. 철수 때 돌려보낸다 해도 갇혀 있는 동안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입 언저리에 정확히 바늘이 박힌 상태. 이 상태로 목줄이
터져 놓쳐도 시간이 흐르면 바늘이 저절로 빠질 확률이 높다.
낚시바늘에 걸려 나온 자라가 스스로 바늘을 빼낸 모습.
질문 2 방생의 도(道)와 예(禮) 그리고 자비(慈悲)에 대한 답변입니다.
방생에 대해서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는 유가와 불가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으로는 취하느냐, 전부를 취하지 않고 방생해야 하느냐의 차이가 있지요. 유가(儒家)에서는 방생을 인(仁)의 실천이자 생명 존중의 도(道)라고 하여 방생을 중요시했는데, 유교적 방생의 특징은 전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되 자연의 생명에게 예(禮)를 갖추어 취하고 나머지는 정중히 방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방생의 인(仁)에 대한 좋은 글 중 김병기 교수(전북대 명예교수)의 글을 참고로 인용합니다.
[논어에는 공자의 생활모습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낚되 그물질하지 않으셨고, 잠자는 새를 주살로 쏘지 않으셨다’는 구절도 그런 예이다. 낚되 그물질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차별 남획’을 안 했다는 뜻이고, 잠자는 새를 쏘지 않았다는 것은 ‘기습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차별 남획은 잔인한 살상이고, 기습공격은 비겁한 살생이다. 공자는 일상의 식생활과 제사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물을 포획해야 할 때도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안 함으로써 ‘측은지심’의 ‘인(仁)’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도 ‘못에 촘촘한 그물을 넣지 않으면 물고기나 자라 등이 먹고 남을 만큼 번식하고, 때에 맞게 벌목하면 재목을 쓰고 남을 만큼 숲이 울창해진다’고 했다. ‘무차별 남획’과 ‘기습공격’에 대한 자연의 보복에 직면한 인류가 지금이라도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환경보호는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지 않는 어진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옛 어른들은 한 밥상에 닭고기와 달걀 요리를 함께 올리는 것도 나무라셨다. 어미 닭과 새끼 달걀을 함께 삶는 것을 차마 못 할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仁)’을 잃는다면 과학이며 경제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폴 퀸네트의 물고기에 대한 도(道)와 예(禮)
한편 불가에서는 석탄일(釋迦誕辰日)과 삼월 삼짇날, 정월 대보름날 그리고 8월 보름날에 방생법회를 하는데 이는 일체의 살아있는 생명을 훼손하지 않는 생명 존중의 자비덕목(慈悲德目)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낚시를 하면서 붕어를 귀히 여기고 방생하는 것은 생명 존중도 있지만 반갑고 친하게 대하고 보내주고 싶어서이지요.
이 부분에 대해 미국의 낚시인이자 심리학자이며 수필가인 폴 퀸네트(Paul Quinnett)는 <물고기도 우리와 같이 지구에 더불어 사는 동료이기 때문에 다시 보내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상어를 사랑하는 지구상의 모든 낚시인의 생각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왕에 방생을 할 거면서 굳이 살림망에 보관해서 입술에 상처가 나고, 지느러미가 닳고, 비늘이 빠지게 해서 방생하는 것은 예(禮)나 자비(慈悲)가 아닙니다. 한 망태 모아서 뿌듯하게 들고 자랑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고 방생하는 것이 자기만족은 되겠으나, 정신없이 낚여 올라온 붕어에게는 살림망에 있는 긴 시간이 고통의 시간인 것이지요.
그러니 기왕에 방생을 할 요량이면 낚으면서 붕어와 1대1로 즐긴 후 곧바로 방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지요. 다만 꼭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은 취하되 일단 취한 물고기는 소중히 그리고 가치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폴 퀸네트의 낚은 물고기에 대한 道와 禮 : 물고기를 놓아주려면 얼른 놓아주고, 먹으려면 재빨리 확실하게 죽게 하여 고통을 줄여주어야 한다.] 저서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에서.
입 근처에 박힌 바늘은 방생 후 저절로 빠진다
질문에서 목구멍에 박힌 바늘을 빼지 않고 목줄을 잘라서 방생할 경우 물고기가 죽거나 바늘이 박힌 채로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는 염려를 했는데, 이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필자가 여러 차례 바다와 민물고기를 대상으로 실험관찰을 한 바에 의하면 목구멍까지를 한계로 하여 입 안쪽이나 목구멍 보이는 곳에 박힌 낚싯바늘은 물고기가 스스로 뱉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붕어뿐만 아니라 장어, 자라 등 비교적 바늘이 깊게 박히는 어종도 목줄만 끊어서 목욕통에 넣어두고 하루 이틀 밤을 보내고 관찰하면 대부분 바늘을 뱉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구멍을 통과하여 깊이 삼킨 바늘은 뱉어내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붕어 입속에 바늘이 박혔는데, 눈으로 보이는 위치에 박혀있다면 그냥 목줄을 끊고 방생을 해도 대부분 생존한다고 믿어도 될 것입니다. 오히려 바늘을 빼느라고 입안에 피가 흐르도록 상처를 내게 되면 그 붕어는 생존 확률이 더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방송에서 방생을 하는 것이 보여주기식 행동이 아니냐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방송 슬로건인 ‘놓아주는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필요 이상으로 물고기를 가져가는 것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수급의 낚시인은 살림망 자체를 물에 넣지 않고 낚시를 즐기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아예 살림망 자체가 없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낚은 물고기를 즉시 방생하는 것도 습관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같이 출조한 사람이 “오늘은 물고기가 많이 필요하니 좀 모아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방생을 해버리는 일이 허다했으니까요.
우리가 낚시를 하면서 방생을 하는 것은 유가의 인(仁)과 도(道) 그리고 예(禮)를 실천하는 것이고, 불가의 자비(慈悲)를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크게는 대자연의 혜택 속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자연보전(自然保全)과 자연보호(自然保護)를 실천하는 것이고요.